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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프랑스에서 등장한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는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영화 운동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러나 누벨바그 이후의 프랑스 영화는 이 거대한 흐름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그 정신을 계승하고 변화하며 오늘날까지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의 흐름, 시대별 특징, 주요 감독과 작품, 그리고 현대 프랑스 영화가 지닌 의미를 정리합니다.
누벨바그 이후의 영화
누벨바그는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클로드 샤브롤 등 젊은 비평가 출신 감독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 상업 영화 문법을 해체하고, 감독의 주관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작된 영화 혁신 운동이었습니다. 이들은 저예산, 자연광 촬영, 비연기자 활용, 거리 로케이션 등을 통해 기존 영화 문법에 저항했고, ‘작가주의’라는 개념을 세계 영화계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누벨바그는 일정 시점 이후 제도권에 편입되거나, 감독 개개인의 실험으로 흩어지며 조직된 운동으로서의 성격은 빠르게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영화는 누벨바그의 철학과 형식을 참조하되, 보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포괄하며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오늘날 프랑스 영화는 누벨바그의 유산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신—개성, 자율성, 실험성—을 현대 사회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는 프랑스 영화가 여전히 세계 예술 영화의 중심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의 흐름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970~80년대는 실험의 연속과 정치적 시선의 시대
누벨바그가 끝난 직후의 프랑스 영화는 두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는 기존 감독들의 개인화된 영화적 실험, 또 하나는 새로운 사회적 주제를 다룬 현실 참여형 영화입니다. 고다르는 정치적 메시지를 더욱 강화하여 실험영화를 지속했고, 트뤼포는 보다 인간 중심적이고 감성적인 서사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에는 자크 리베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클로드 밀러 등의 감독이 활동하며, 문학·정치·심리학과 접목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68 혁명의 여운은 영화 내에서도 강하게 작용하며, 젠더, 계급, 권력 구조를 다룬 영화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La maman et la putain’은 3시간 넘는 러닝타임과 대부분 대화로 구성된 영화로, 포스트-누벨바그의 대표적 실험작입니다. 정치적이면서도 심리적인 접근, 대사 중심의 내러티브는 이후 프랑스 영화의 스타일을 규정짓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0~2000년대는 장르 혼합과 국제적 감각의 시대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는 전통적인 예술영화의 틀을 넘어 장르적 유연성을 확보하며,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뤽 베송의 ‘레옹’, ‘제5원소’는 프랑스 영화가 할리우드적 스펙터클과도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는 동화적 미장센과 독특한 감성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예언자’, ‘디판’ 등을 통해 장르 영화의 외피를 입은 사회적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프랑스적 미학’이 보다 부드럽고 대중적인 형태로 확장되었다는 점입니다. 누벨바그의 형식 실험보다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이민, 실업, 청년 문제 등)를 드라마틱하게 다루는 현실성, 그리고 시각적 세련미가 강조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이 흐름은 프랑스 영화가 국제 영화제뿐 아니라 세계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는 정체성, 젠더, 포스트식민의 언어 위주
2010년대 이후의 프랑스 영화는 다시금 사회적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서사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언어 자체에 대한 고민, 젠더와 정체성, 포스트식민주의, 종교 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 간의 관계를 고요하지만 강렬한 시선으로 담아내며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여성 감독의 입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마티 디옵의 ‘Atlantics’, 라쥐 리의 ‘레 미제라블(2019)’ 등은 아프리카 이민자, 파리 외곽의 불평등, 인종 문제를 집중 조명하며, 프랑스 사회 내부의 분열을 영화적으로 조명합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영화는 다시금 ‘누가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영화 제작의 다양성과 윤리를 중시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형식보다는 주체성, 미학보다는 서사의 균형 속에서, 프랑스 영화는 스스로의 사회를 직시하고 있습니다.
누벨바그는 끝났지만, 그 정신은 계속된다
프랑스 영화는 누벨바그라는 거대한 영화 혁신을 거친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과거에는 형식을 해체하고 창작의 자유를 외쳤다면, 지금은 정체성과 다양성, 그리고 사회적 현실을 다루는 윤리적 시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 영화는 단지 특정한 형식이나 스타일을 반복하지 않고, 시대의 요구와 미학적 실험을 끊임없이 결합해 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영화는 매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고, 동시대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예술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벨바그 이후의 프랑스 영화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감독의 시선’과 ‘자율적 예술’에 대한 존중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콘텐츠 중심의 영상 시대 속에서도 프랑스 영화가 고유의 품격과 깊이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